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영화

바이센테니얼맨(1999) -인간을 분계하는 잣대는 실존하는가- @이성휼


바이센테니얼맨 (1999)

-인간을 분계하는 잣대는 실존하는가-


 우리가 아는 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회의하는 유일한 생명체이다.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. 많은 작가들이 인문학적 성찰을 기반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작품들을 그려왔다. 그 양태는 다양하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인간에게서 인간의 요소를 소거하는 것이다. 지극히 표준에 가까운 선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는 전례 없는 난관에 봉착한다. 그리고 그 난관에서 실족함으로써 그는 '인간다움'을 잃는다. 때론 그와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하여 인간으로서 인간성을 지키는 것 역시 인간다움임을 역설하기도 한다.


 

 1999년 작 바이센테니얼맨(Bicentennial man)은 상기된 과정을 역행함으로써 인간을 정의한다. 영화의 주인공인 앤드류 마틴(로빈 윌리엄스 분) bicentennial man이란 원제가 암시하듯, 200년을 산 사내이다. 앤드류 마틴은 가사로봇 NDR-114로부터 비롯되었다. NDR-114는 오로지 가사를 돕기 위하여 인간의 형상과 인간의 목소리를 취한 가구일 뿐이었고, 그의 인공두뇌는 사고가 아닌 계산을 하기 위하여 존재하였다. 그러나 NDR-114는 인간과 같이 능동적으로 발전한다. 물론 여타의 로봇들, 심지어 기계들 역시 발전할 수 있다. 그러나 이는 정보의 축적에 기반하여 동일 변수에 대해 반응의 수를 늘리는 수동적이고 수평적인 발전일 뿐이다. NDR-114 (이하 앤드류)의 발전에는 수합된 정보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개재되어있다. 이를 기저로써 앤드류는 기존에 없던 요소를 '창작'한다. 창작이란, 기존의 요소를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요소를 알맞게 조합하고 변용함을 의미하는 인간 본유의 능력이다. 그러므로 그런 인간의 창작 능력을 가지게 된 앤드류는 일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.


 앤드류는 그 외에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, 인간적인 모습을 배운다.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유머와 수사(修辭)를 구사하기도 하며, 일방적으로 명령을 이행하는 체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하는 자유를 배우기도 한다. 그 과정 중 앤드류는 더욱 인간의 형상으로 변화한다. 기본적으로 로봇은 단일 주형(鑄型)으로 만든 동일성형체(同一成形體)이다. 여기엔 결함도, 개성도 없다. 그 모습은 그저 엔지니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기능적인 모습과 디자이너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미관적인 모습이 그대로 결부된, 가장 이상적인 상태일 뿐이다.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. 인간은 불완전성과 무작위성에 의해 형성되며, 그 때문에 개인은 '인간'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닌 자신의 이름, 곧 고유명사로 불릴 수 있다. 그러므로 고유의 이름과 모습을 갖게 된 앤드류는 이제 상당부분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.



 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드류는 여전히 로봇이다. 그의 삶은 3차원에 귀속되어있기 때문이다. 로봇과 달리 인간의 삶은 3차원에 시간 개념이 추가된 4차원에 존속한다. 인간에게 있어 시간은 유한하기에, 그 시간의 가치는 무한하다. 그리고 그 무한한 가치의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의미를 지닌다. 이를 자각한 앤드류는 영화의 대단원에서 스스로 삶이란 문장에 종지부를 찍어 그 문장에 의미를 부여한다. 그리고 앤드류는, 이제 완연한 인간으로 인정받는다.


 왜 인간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냐는 물음에 앤드류는 답한다. '로봇시절의 습관이오. 로봇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, 아직 인간의 말을 듣는 게 좋소.'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도 내재되어있는 것이다. 결국 앤드류는 태초부터 인간성의 맹아(萌芽)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. 그리고 이는 색즉시공적, 니힐리즘적 논의로 진전되어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수렴한다. 과연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분계하는 잣대가 실존하는가. 본 영화가 기성영화들과 다른 방법으로 인간을 조명한 것은, 바로 이러한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일 것이다.